무언가를 찍는다는 행위는 결국 소유하려는 욕망일까?
이 글은 60% 이상 ChatGPT의 도움을 받아 작성한 고찰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쓰면서 많은 생각과 질문이 떠올라 기록합니다.
사진을 찍는다는 행위는 단순한 기록일까, 아니면 무언가를 소유하려는 욕망일까. 저는 이 질문을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던져 왔습니다. 끊임 없이는 아니고 방금.
롤랑 바르트는 사진을 ‘증거’라고 표현했습니다. 사진 속 피사체는 이미 지나간 시간이며, 사진은 그 순간의 존재를 증명하는 강력한 증거물이 됩니다. 그래서 사진을 찍는 행위는 과거의 순간을 붙잡아 ‘소유’하려는 욕망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사진은 개인의 기억일 뿐만 아니라 타인과 경험을 나누는 공유의 도구이기도 합니다.
바르트는 사진의 의미를 ‘스투디움(studium)’과 ‘푸둑스(punctum)’라는 두 개념으로 나누어 설명했습니다. 스투디움은 사진에 담긴 사회문화적 의미, 우리가 일반적으로 인지하는 사진의 내용과 관심을 말합니다. 반면 푸둑스는 사진을 보았을 때 개인의 내면 깊숙이 와 닿는, 의도하지 않은 작은 충격이나 감정적 자극을 뜻합니다. 사진을 찍고 바라볼 때, 이 두 가지가 동시에 작용한다고 생각합니다. 셔터를 누를 때는 소유욕과 기록의 의지가 강하지만, 그 사진이 나와 타인의 감정을 움직이고 연결하는 순간에 깊은 의미를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친구 중 한 명은 여행 내내 1,000장이 넘는 사진을 스마트폰으로 찍었습니다.
그 친구가 그 많은 사진을 다시 얼마나 볼지는 모르겠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점점 자신을 내려놓고 살면서, 한 장의 사진에 모든 에너지를 쏟고 싶어졌습니다.
연사 모드로 사진을 찍지 않고, 꼭 찍어야 할 이유가 있을 때만 카메라를 켭니다.
책이나 강의에서는 ‘많이 찍으라’고 하지만, 저는 오히려 ‘한 장’에 집중하는 편입니다. 그 한 장에 내 시선과 감정, 의도 모두를 담으려 합니다.
인스타그램을 삭제한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SNS에서는 ‘잘 찍힌’ 사진만 올리게 되고, 올리는 시기와 타인의 시선에 신경 쓰며 결국 나 자신을 잃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보여주기 위한 사진과 진심으로 간직하는 사진은 다른 영역입니다. 이 둘을 공존시키는 것이 불가능했습니다.
또한, 사진을 너무 많이 찍는 행위는 ‘순간을 소유하는’ 것을 넘어, ‘진짜 순간을 놓치는’ 행위가 될 수도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여행 중에도 친구와 함께여도 사진 찍기에 몰두하느라 서로에게 집중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사진이 나와 타인의 경험을 방해하지 않도록 조심하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사진을 찍는다는 행위에는 ‘소유’의 욕망이 분명히 있습니다. 순간을 붙잡고 기억하려는 욕구 말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것이 곧 ‘소유’의 욕망으로만 환원되지는 않는다고 믿습니다. 사진은 ‘순간을 공유하는 행위’이기도 합니다. 나 혼자만의 기억을 위해 찍는 것도 있지만, 그 사진을 누군가와 나누고 싶은 마음이 더 큽니다.
내가 사진을 찍고 싶었던 이유는 단순히 ‘기록’이 아니라 ‘표현’이었습니다. 감정과 철학, 그리고 이야기를 담기 위해 카메라를 들었습니다. 촬영한 사진 한 장이 내게 전달하는 감정과 메시지는 단순한 이미지 이상의 것이었습니다.
롤랑 바르트가 말한 ‘사진은 죽음을 포함한 시간의 흔적’이라는 관점도 인상적입니다. 사진은 이미 사라진 순간을 붙잡으려는 인간의 본능적 욕망을 드러냅니다. 하지만 그 욕망이 꼭 부정적인 의미만 가진 것은 아닙니다. 사진은 소유이자 동시에 ‘기억의 공유’, ‘경험의 전파’라는 긍정적 가치도 내포하고 있습니다.
나는 앞으로도 소유욕에 사로잡히지 않고, 순간과 감정을 담고 나누려는 마음으로 카메라를 들 것입니다. 무언가를 찍는 행위는 결국 나 자신과 타인의 경험을 잇는 다리이자, 시간과 감정을 응축한 결정체입니다. 저는 롤랑 바르트를 모르는데 글을 쓰면서 덕분에 알게 되었습니다. 롤랑 바르트의 "밝은 방"이라는 책을 한번 읽어보려고 합니다.